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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보는 세상] 겨울은 즐거워17세기 무역 대국으로 성장한 네덜란드는 미술사에서 유일할 정도로 풍속화가 발달했다. 시민 계급 성장으로 미술 시장이 가장 큰 덕을 봤다. 집집이 그림을 걸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다고 한다. 대부분 일상을 그린 그림이었다. 불가리아 출신의 석학이며 문예 비평가인 츠베탕 토도로프(1939~2017)는 저서 '일상 예찬'(1993)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네덜란드 풍속화에 씨를 뿌리고 수확까지 한 화가는 피터르 브뤼헐(1525~1569)이다. 네덜란드 독립 전부터 농민 생활을 두루 그리며 때로는 스페인의 압정을 교묘히 숨겨놓기도 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눈 속의 사냥꾼'(1565)인데, 일 년을 묘사한 여섯 작품 중 겨울을 그린 그림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조감도 시점으로 마을 풍경과 사람들을 스냅사진처럼 세세하게 그려 '풍속화 대가' 면모를 드러낸 작품이다. 이처럼 네덜란드는 겨울이면 꽁꽁 언다. 바다보다 낮은 국토인 탓에 얼어붙는 면적도 넓다. 얼음 나라가 되는 겨울 풍속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일상이다. 예부터 주민들에게 스케이팅은 취미가 아니라 생활이었다. 지금도 네덜란드가 겨울 올림픽에서 빙상 최강국인 이유이기도 하다. 브뤼헐보다 훨씬 네덜란드 겨울 풍경에 몰입한 화가가 있다. 브뤼헐 바로 후대 화가인 헨드릭 아베르캄프(1585~1634)다. 넓은 화면, 많은 사람, 화려하지 않은 색조 등에서 브뤼헐과 비슷한 뉘앙스를띈다. 그의 대표작은 '스케이팅하는 사람들 겨울 풍경'(1608)이다. 마을을 온통 뒤덮은 얼음 위에서 '날을 세운' 사람들이 자기들만의 놀이에 심취해 있다. 각각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겨울을 즐기는 일상이 이만큼 두드러진 그림을 찾기 어렵다. 혼자서, 짝을 지어, 무리를 이뤄, 복장과 관계없이, 움츠러들지 않으며, 타인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와 꽃 나들이 나선 봄인 양 겨울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화면의 반을 차지하는 하늘은 또 어떤가. 회색빛 구름이 얼음의 색깔과 조화를 이뤄 하나가 된 듯하다. 헐벗었지만, 하늘까지 뻗은 나무와 나무 위를 날고 있는 새들이 알찬 구도를 만든다. 다른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특징이 이어진다. '도시 부근 얼음 위 풍경'(1615)이다. 오늘날에도 '겨울 풍경 전문화가'로 인정받으며, 네덜란드 국민들 자부심을 세워주는 화가다. 아베르캄프가 존경받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그는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장애인이었다고 하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온화한 성품이었고,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말이 없는 세상에 살면서 그가 얻은 건 고통이나 소외보다는 '고요'였던 것 같다. 많은 사람의 떠들썩한 일상을 그리며 자신의 고독한 내면을 극복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을 그림으로 채웠다는 느낌이 든다. 그의 생애를 읽으며 논어의 마지막 문장을 상기한다.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不知言無以知人也)" 여기서 언급하는 '말'은 우리가 입으로 뱉고, 귀로 듣는 말, 즉 아베르캄프가 얻지 못한 말과는 다른 범주다. 하지만 그가 간직했던 침묵과 적막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말을 알지 못했으나, 사람과 세상을 알았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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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보는 세상] 33년 걸친 한 우편배달부의 집념(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그는 작가가 아니었다. 건축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만든 건축물을 보기 위해 세계에서 연간 1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한적한 프랑스 남동부 시골, 오트리브(Hauterives)를 찾는다. 페르디낭 슈발(1836~1934)은 평생 걷고 또 걸은 우편배달부였다. 소중한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해 하루 약 30km 거리의 궁벽하고 척박한 길을 돌아다녔다. 어느 날 돌에 채 넘어졌다. 돌을 원망하다 돌을 자세히 본 그에게 영감이 떠올랐다. 이후 걷는 걸음마다 주변을 살피며 돌을 모으기 시작했다. 모은 돌로 '짓기' 시작했다. 지으면서 건물의 구조와 형태를 상상하며 자기 머리를 채운 '이상'으로 향했다. 그가 지은 건축물에 '팔레 이데알 (Palais Ideal)', 즉 '이상의 궁전'으로 이름 붙였다. 건축물을 결코 단기간에 지은 것이 아니다. 직업에 충실하며 틈틈이 지었다. 궁전을 지은 시간은 무려 9만 3천여 시간, 약 33년이었다. 1879년에 돌을 모으기 시작해, 외벽을 짓는 데만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멈추지 않고 내부를 꾸며 마침내 1912년 꿈을 이뤘다. 가히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과 미술에 대해 전문적인 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오늘날까지 굳건한 아름답고 튼튼한 성을 구축했다. 그의 집념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건축물을 자세히 보면 안토니 가우디가 지은 '성 가족 성당'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할 만하다. 평범한 한 시골 집배원 노력에 가족과 주민들은 아마 찬사를 보내기보다 '미친놈' 취급을 했을 것이다. 점차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가족들도 인정하고 도왔다고 한다. 그는 상상을 북돋우기 위해 다른 문화 건축물도 공부했다. 프랑스식 궁전 모양뿐 아니라 이슬람, 중국, 인도 문화 건축물 양식까지 합쳤다. 그는 자신이 지은 이 건축물에 묻히고 싶었지만,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포기할 법한데, 그는 아니었다. 허가조건에 맞게 다시 8년에 걸쳐 자신과 가족을 위한 영묘를 완성했다. 불굴의 의지로 그와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려울 지경이다. 궁전 벽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농부 자식으로 태어나 농부로 살아온 나는 나와 같은 계층의 사람 중에서도 천재성을 가진 사람, 힘찬 정열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살고 또 죽겠노라" 유언으로 남긴 말도 의미심장하다. "나는 '불가능'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해선 안 된다고 했던 나폴레옹을 떠올렸다. 그가 옳다" 한 인간이 품은 '자존(自尊)'의 힘은 이만큼 크다. 돌을 하나하나 쌓을 때마다 스스로 쌓이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고, 자기 생각이 형상으로 실현되는 것을 보며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세월은 그에게 전혀 장애물이 아니었다. 33년이라는 자존의 시간에 그 어떤 방해가 그를 막을 수 있었을까? 작고한 시인, 신현정에게 '길 위의 우체부'라는 시가 있다. '세상은 온통 나비 떼 나비 떼 정작 나는 행방불명이 되고 싶었다 민들레 옆에 자전거를 모로 눕히고 쪼그려 앉아 담배 피운다 아, 나는 선량했다' 이 시를 읽으며 슈발을 생각했다. 슈발은 선량했다. 슈발은 건축에 몰입하는 동안 행방불명이 되고 싶었다. 슈발에게 세상은 나비 대신 온통 돌이었고, 궁전이었고,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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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보는 세상] 요절한 천재의 뒤늦은 인기(서울=연합뉴스) 도광환 기자 = 에곤 실레(오스트리아. 1890~1918)만큼 점점 인기가 치솟는 화가도 드물다. 2022년 서울서 처음 열린 세계 3대 아트 페어, '프리즈(Frieze)'에는 실레 전시관이 따로 마련돼 있었는데, 항상 관객들이 몰려 30분 이상 줄을 서 기다려야만 입장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단 28년 살았다. '요절한 천재'라는 안타까움도 있겠지만, 강렬한 색과 자유로운 구성, 독특한 선을 구사한 그의 독창성을 전 세계가 주목한 지 오래다. '포르노 같은 에로티시즘을 그린 화가'라는 기존의 평가를 뛰어넘었다. 그를 인정하고 발탁한 화가는 구스타프 클림트였다. "내가 자네에게 배워야겠어"라는 클림트 칭찬이 유명하다. 잘 알다시피 클림트 작품도 '관능의 세계'다. 두 작가를 비교한 한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클림트가 장식으로서 나체를 그렸다면, 실레는 내면으로서 나체를 그린 화가다" 실레도 렘브란트, 고흐처럼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특이한 점은 나체 자화상을 자주 그렸다는 점이다. 나체 자화상을 통해 외모에 대한 집착과 내면의 열정을 여과하지 않고 드러냈다. 이는 그의 성장 과정과도 연결된다. 일찍 죽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대신, 어머니와는 매우 소원한 관계였다. 아버지를 잃은 뒤 내면에 스며든 상처와 고통,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나체 자화상으로 노출했다는 평가다. 또 하나 독특한 점이 있다. 자신의 나체부터 자주 그린 여성들 나체도 뒤틀리거나 말라붙은 모습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허무한 퇴폐성', '다다를 수 없는 여성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고 본다. 실레에겐 두 여성이 등장한다. 그의 모델이었다가 연인 및 부인 역할을 한 발리 노이칠과 정식으로 결혼한 에디트 하름스다. 노이칠은 어려웠던 시절, 함께 고난을 겪으며 도움을 주고받은 사이였지만, 막상 결혼하게 되는 하름스를 알게 되면서 결별했다. 노이칠과 헤어질 무렵 그린 작품이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죽음과 여인'(1915)이다. 여인은 처량할 정도의 가녀린 두 팔로 두려운 표정을 띤 남자를 억지로 포옹하고 있다. 그와 노이칠을 그렸다고 추측한다. 이후 안정적인 신분을 가진 하름스와 결혼한 뒤 그린 그림이 '포옹'(1917)이다. 풍만한 여성, 근육질 남성이 서로 살갑게 부둥켜안고 있다. 색이나 형태가 이전 그림과 비교할 때 안정적이고 부드럽다. 가족을 온통 품으려는 것인지 팔을 무척 길게 그렸다. 앞의 여인은 하름스이며, 그 앞엔 곧 태어날 둘 사이 상상 속 아기다. 행복감에 젖은 듯한 세 사람 표정은 아늑하다. 하지만 그가 얻은 평온은 스페인 독감이 앗아갔다. 출산을 앞둔 하름스가 독감에 걸려 죽고, 3일 뒤 그도 그녀 뒤를 따랐다. 실레는 부인과 아기를 하늘에서 만나 그림보다 더 환하게 웃었을까? 실레나 고흐, 모딜리아니 등 짧고 불우했던 화가들 삶과 그림 세계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아무리 후세에 인정받고 인기를 얻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굴곡 속 현세의 삶은 누구보다 불행했건만…….' 실레 그림을 두고 '세기말 상실감'을 그렸다고 하지만, 그의 삶 자체가 '상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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